기도의 두 차원
기도는 ‘누구(Who)’를 구하는 차원(次元)과 ‘무엇(What)’을 구하는 차원이 있다. ‘누구’를 구하는 기도와 ‘무엇’을 구하는 기도가 잘 ‘조화(harmony)’를 이룬 ‘기도생활’이라야 ‘건강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Who)를 구하는 차원이 없이, 단지 무엇(What)만을 구하는 기도를 기복신앙이라고 말한다. 무엇만을 구하는 기도의 사람은 하나님 신뢰와 순종이 없이 오직 자기 욕망에만 집착되어 있다. ‘유치한 기도’가 모든 ‘관심의 초점’이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다면 ‘성숙한 기도’는 하나님에게 맞추어져있다. ‘유치한 기도’는 오직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하는 하나님으로만 존재한다.
무엇(What)만을 구하는 기도는 인격형성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한다. 자기 집착의 현상은 지극히 이기적인 것으로 매사가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불평불만, 원망, 불만족, 좌절의 열매들로 나타난다. 기독교 문서 사업을 하는 어느 장로님께서 “한국교회 기도의 대부분이 무엇(What)을 구하는 기도(구걸기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요인은 기도의 문제에 있다. 대부분의 기도가 자기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때때로 하나님을 다그치고, 닦달하고, 심지어는 협박까지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기도의 수준에서 어떻게 올바른 신앙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영성(spirituality)에 이르게 하는 기도’는 ‘누구(Who)를 구하는 차원의 기도’이다. 영성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생활’을 통해서 생성되고 무르익는다. ‘하나님과 교제’가 없이 달라고만 하는 차원에 머문다면 영성은 기대 할 수 없다.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 없이 그리스도인다운 품성이나, 삶은 불가능하다. 영성(spirituality)은 “종교적 행위와 윤리적 삶을 유발하는 정신적 구조”로서 ‘삶’을 말한다. 따라서 영성이라는 말은 이론적이 아니라 실천적 용어이다.
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없는가? 한마디로 영성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who)를 구하는 차원의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영성은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 곧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자라고 성숙해간다. 한국교회가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고 있다. 대부분이 ‘무엇(What)’을 구하는 기도의 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의 차원만을 가지고 ‘신앙생활’이 될 리가 없다.
‘하나님과 교제의 차원’인 ‘골방기도’로 나가야 한다. ‘골방기도’란 꼭 골방에 들어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의 시간을 갖는데 방해를 받지 않는 ‘조용한 장소’라면 어디든지 그곳이 곧 ‘골방’이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청원기도를 지양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을 구한다.
다윗이 위대한 성(聖)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도의 중심’이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향한 타는 목마름의 기도의 사람’이었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시143:6) 다윗의 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마음’과 ‘기도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고요한 시간, 주님을 향하여 손을 펴는 것은 하나님 지향의 삶, 곧 ‘하나님 갈망’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누구(Who)를 구하는 기도생활에서부터 ‘건강한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여 밤같이 어두운 세상이 되었다 할지라도, 의의 태양이 되시며, 생명의 빛 되시는 주님이 항상 내 곁에 계시기에 ‘빛과 소금 의 삶’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분명히 내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일수록 ‘별’은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신앙의 사람’ 이라면 틀림없이 오늘 이 시대에 빛과 소금으로 존재하는 사람일 것이다.
- 창골산 봉서방에서 퍼온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