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한 두달 전부터 저는 애통 이라는 단어에 필이 꽃혔습니다! 애통하라! 애통하라!.
사랑하는 자여 애통하라!
산상수훈 중 두번째 말씀"천국 백성의 표준" .천국 백성의 마음과 행동과 삶의 영역에서 시금석 이 되는 표준. 천국백성이 가져야 할 마음과 행동 이것이 핵심 입니다.
얼마전부터 애통이라는 단어가 생각나고 애통 하고 싶은데 애통이 되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의 두 번째 복에서 말씀하신 ‘애통’이 헬라어 단어인 penqevw(펜데오)는 사람이 죽었을 때 슬퍼하는 감정과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 감상적이거나 애수적인 슬픔이 아니라 가슴을 부수는, 창자를 끊을 것 같은(斷腸), 뼈를 깎는 슬픔을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이며, 감출 수 없는 슬픔. 애통이라는 단어는 가슴을 찢는다. 그러면 우리가 왜 애통해야 할까? 죄 때문입니다! 죄가 있음에도 죄가 많음에도 우리는 왜 애통하지 않을까? 아주 작은 죄에도 민감해야 하는데.... . 악한 사람은 절대 애통해 하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은 애통해야 할 필요를 못 느낀다. 하나님으로부터 가까이 있을 때 애통할 이유를 알게 된다. 햇빛이 비치면 먼지가 다 드러 난다. 어둠 속에서는 전혀 먼지가 보이지 않는다. 죄에 대한 해결책은 애통해야 하는 것이다. 눅 6: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고 있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자신의 허물에 대해 애통함이 없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내 실상 내 전적 타락. 내가 벌레요. 얼마나 악한 자인가? 어떤 목사님은 자기가 죄의 공장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육적 자아가 깨어져서 나오는 슬픔. 로또를 맞아서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당첨되고 넓은 평수에 살게 되어서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애통하는 자가 애통하는 자가복 받는 다고 했다. 내 자신의 죄악을 보고 하나님의 뜻에 원수가 되었던 자신의 죄를 바라보면서 애통해야 한다 애통하는 자는 왜 복이 있을까요 주님은 마음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통회하는 자를 기뻐하신다고 하셨다 우리 인간은 죄의 본질로 인해 상한 마음을 가지는 있었기 때문에..애통하는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죄를 뉘우치는 자가. 죄를 보고 탄식하고 애통해 하는 자가 복이 있다. 자기 애통이 반복될수록 세상에서 자신을 자꾸 격리시키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애통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애통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예수 믿기 전에는, 양심의 거리낌 없이 잘도 살다가, 이제 참으로 예수를 만난 후에는, 이전에 없던 애통이 생기게 된다. 주님은 우리 눈물을 닦아주시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애통함 속에서 울게 하신다. 그리고 그 애통함이 복이라고 말씀하신다. 또 자신의 죄를 발견 하고 애통을 하셨다면 타인의 죄, 사회의 죄, 민족의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타인을 위해서도 애통할 수 있어야 한다 . ▲개인적인 애통에서 → 사회적 애통으로 발전해야 한다 겔9: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그러므로 애통이 없는 성도, 또는 공동체는 참 교회가 아니고, 참 공동체가 아니요,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것이 자기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것을 깨닫고는“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울부르짖었습니다(참조, 롬 7:15-24).이런 애통하는 자는 역시 나의 이런 죄 때문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고난 당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통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슬픔은 역시 인격을 순화시키고 고상하게 만듭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실상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슬픔을 가진다면,¬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우리 자신 겸손해집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과 존경과 경의에 대해 요구하는 거만하고 오만한 태도는 모두 신속히 사라집니다.
땅의 화려한 물건들에 대한 욕심에서 우리를 구해줍니다. 우리를 보다 진지하고 사려 깊게 만들어 줍니다.
이 애통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그 동일한 것을 봅니다.
그는 사회의 상태와 세상의 상태에 관심을 가지며,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이 생에서 그렇게 그들의 삶을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애통합니다. 진실로 그는 더 나아가서 인류의 도덕적 혼란과 불행과 고통을 보면서,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듣고 읽으면서 온 세상의 상태 때문에 애통합니다. 그는 온 세상이 불건전하고 불행한 상태에 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그것이 모두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 때문에 애통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인간의 죄악과 불행을 보시고 애통해 하셨고. 주님이 그가 고난과 슬픔의 사람이 되고 십자가를 지신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멸망당할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그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다”하시면서 우신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 들어와 인생에 주입하고, 인생을 망치고 불행하게 만든 죄라는 그 무섭고 추악하고 더러운 것을 주님은 보았습니다. 주님은 그것 때문에 우셨고 심령으로 고통하셨습니다.
주님은 그것 때문에 애통하셨으며, 참으로 그를 따르는 자, 곧 그의 본질을 받은 사람들도 애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죄 자체의 성격, 그 죄가 세상에 들어와 그 무서운 결과를 초래 하기 때문에 애통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는 것을 보고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렘 4:19).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와 그것으로 인한 불행을 보고 애통하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죄사함 받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국가, 사회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 이요 …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와 한국교회와 이 나라의 상태를 보고 이제 울고 있습니까? 웃고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웃을 때가 아니라 울어야 할 때입니다. 신앙과 인격이 삶의 변화 없이 복 받고 형통하게 되는 것을 원한다. 십자가는 없고 성공과 기복과 번영의 복음만 있다. 고난이 없는 영광. 죄에 대한 슬픔과 애통이 없는 잔치. 사회와 온갖 죄악이 판을 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방불케 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우리 주님은 선언하셨습니다.
먼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에 해당하는 팔라칼레오(헬3870)의 의미
파라칼레오는‘ ~ 곁에, 가까이’를 뜻하는 전치사 파라와 ‘부르다’를 뜻하는 동사 칼레오가 결합된 것이며, 따라서 기본 의미는 ‘아무개를 자기에게로(곁에, 가까이) 부르다’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이 단어는 ‘격려하다, 위로하다, 힘(기운)을 돋구다, 강하게 하다’등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애통합시다!
우리 자신의 죄를 위해. 타인의 죄를 위해.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사람들이 이탈하는 모습을 보며. 사랑하는 가족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사탄에게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것에서 해방 되도록.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 숭배하는 민족의 죄를 위해 북한의 동포들이 자유롭게 예배하기를 위해 간절히 애통하는 그 애통이 속히 북한의 형제 자매들을 구원하며 위로 해 주시도록....
애통합시다!
특별 새벽기도회에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깊이 애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