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깨우러 가노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하시니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
마르다의 영접 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의 상투적인 종교용어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중심문단● 21 "Lord," Martha said to Jesus, "if you had been
here, my brother would not have died. 22 But I know that even now God will give
you whatever you ask." 23 Jesus said to her, "Your brother will rise again."
깨달음과 믿음이 없는 제자들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 그러자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12). 이것은 ‘그렇다면 굳이 위험이
도사리는 유대 땅으로 가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잠들었다는 표현이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13-14).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나사로가 죽기전에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제자들을 위해서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의 부활의 기적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깨닫고 믿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비록 나사로가 이미 죽었고, 유대땅에는 생명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에게로 가자!” 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15). 한편 도마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예수님의 적극적인 의도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도 주와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반응했습니다(16). 이 말은 ‘주님이 저렇게 원하시는데 우리도 그냥 죽은 셈치고 같이 가자!’ 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도마의 이와같은 적극적인 태도는 훗날 그가 온전한 믿음을 고백하는데 귀중한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하던 도마의 적극적인 태도와 고백이 있습니까?
상투적인 마르다의 신앙 용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4일이 되었을 때입니다(17). 나사로의 집은 부유했고, 유대인에게 잘 알려진 가문이었기에 예루살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하러 와 있었습니다(18-19).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큰 슬픔에도 불구하고 곧장 마을 밖으로 나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예의를 갖추었습니다(20).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하면서
안타까움을 표현했습니다(21).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는 고백을 더붙이고 있습니다(22). 그러나 마르다는 정작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시자(23), 관례적인
위로 정도로 생각하고,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는 상투적인 신앙용어로 대답하고 있습니다(24).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때로 인간적인 예의와 상투적인 신앙용어는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신앙적인
언행에도 불구하고 정작 진짜 신앙은 없는 마르다의 모습은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