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성수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저
이제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을 강조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이고 케케묵은 전통에 대한 고루한 답이라고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엄격한 주일성수를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자신들과 같은 방식으로 주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정죄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혼란을 느끼고 있다. 주일의 의미와 그것을 지키는 방식에 대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검토는 물론 역사적 맥락에서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주일을 지키는 방식들
편의적자유주의 – 주일을 지킴으로 성경의 견해가 어떤지를 숙고하는 대신 자신들의 편의를 따르는 입장이다. 성경과 신학을 의지하기 보다는 현실적인 삶의 상황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치우친 일원론 –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예배로 보는 입장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견해를 입증하는 성경 구절로서 자주 인용하는 본문이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인간을 통해서 받으셔야 할 영광은 단지 좁은 의미에서의 예배 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삶 전체라는 것이다.
치우친 이원론 –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거룩한 것과 세속적 삶. 하나님을 향한 봉사와 인간을 위한 노동 들을 대립 관계 내지는 상하관계로 본다. 이러한 입장을 주일성수에 적용할 때 신자는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인에 대해 전투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경험적 축복주의 – 이것은 주일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성경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견해는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번영주의적인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고 있다.
주일성수의 진정한 의미
네 가지 방식중 어느 하나도 성경적인 주일성수의 방식이라고 확고하게 말할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방식과 다른 주일성수방식에 대해 서로 정죄하고 비난한다. 성경의 견해와는 상관없는 편의 주의적 자유주의는 올바른 주일성수의 원칙을 보여주지 못한다.
확고한 신학적 검토가 없는 감상적 일원론도 주일성수를 위한 올바른 입장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치우친 이원론 역시 성속을 통합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전망 안에서 주일성수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경험적 축복주의는 주일을 지키는 것조차 자기 번영을 위한 보상주의를 따르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속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더욱이 주일성수에 대해 확실한 보상이 따르지 않을 때 신앙이 약한 사람들은 혼란을 겪게 될 수도 있다는 문제점을 내포 한다.
안식일과 주일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의 역사적 정당성에 관한 것.
신약의 주일이 구약의 안식일과 갖는 신학적 연속성에 관한 것
주일의 규정
주일은 문자 그대로 주님의 날이다. 신약성경에서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네 번 등장하는 데 그 중 세 번은 종말론적 심판을 의미하는 말로, 나머지 한번은 그리스도의 날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안식교를 비롯한 일부 이단에서는 기독교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대표적이 배교의 예라고 규정한다. 그들은 이날이 로마제국 시대에 태양신 숭배의 날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요일을 주일로 정한 것은 기독교가 원래의 순수성을 잃고 이교와 종교적 혼합의 길을 간 사례라고 말한다. 이런식으로 생각한다면 일주일중 주일로 정할 수 있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로마가 숭배하던 것들과 관계없는 날일까? 월요일은 달(月) 화요일은 전쟁의 신 ‘티르‘(Tyr), 수요일은 폭풍의 신 ’오딘‘(Odin) 목요일은 벼락의 신 ’토르‘(Thor), 금요일은 ’오딘‘의 처(妻)이자 사랑의 신인 ’프레야‘(Friya), 토요일은 땅의 신 ’사투르누스(Satumus)와 관련된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말씀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주를 처음 뵌 날도 안식 후 첫날이었다(마 28:1, 막16;9).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를 뵙게 되는 모임도 안식후 첫날이었다(요20:19) 무엇보다, 사도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어 일곱교회의 계시를 본 것이 ‘주의 날’ 바로 주일이었다(계1;10). 그리스도의 부활이 6일 창조 후의 안식보다 더 중요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가 안식일보다 안식 후 첫날을 지키는 일에 더 무게 중심을 두었던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일성수의 개념이 흐려지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안에서 부활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단지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영광의 날에 성도들이 누리게 될 종말론적 안식도 단지 구약의 안식일 제도의 완성만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일 안에서 그리스도가 현재적으로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구약의 안식일은 주일이 드러낼 하나님의 구속경륜의 그림자였다. 구약의 안식일이 희미한 촛불이었다면 신약의 주일은 그날의 주인이시니 그리스도 대문에 찬란한 햇빛이고 그 주일이 바라보는 영원한 안식은 그보다 더 찬란한 영광이다. 우리는 주일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영적인 복과 안식을 누릴 뿐 아니라, 종말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미라 앞당겨 진리와 성령 안에서 실제로 누리는 것이다.
‘주일성수’를 강조 할 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의무만이 아니라 ‘무엇을 누릴 수 있는지’와 관계된 특권과 축복을 함께 강조해야 한다. 주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누리는 날이다. 가족들 간의 유대나 교제의 기쁨, 더 많은 관용과 기쁨, 영적인 자유가 주어지는 날이다. 주일의 신학적 의미에 대한 바른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일을 노예처럼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날로 여기지 않고, 신자들에게 주신 독특한 영적 특권을 누리는 날로 여기게 할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주일성수의 의무에 대해 깊은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구체적인 실천의 규범을 갖지 않는다면, 일관성 있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주일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주일성수의 의무의 아름다움과 행복에 대하여 깊이 은혜를 받은 후에는 스스로 그 지식을 따라 신앙과 양심에 합당하게 주일성수에 관한 개인 규칙들을 만들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회는 각 교인들이 주일을 거룩하고 온전하게 지켜서 영혼을 예배와 진리로써 거룩한 은혜에 이르도록 고양하고 육체를 편안한 쉼으로써 건강과 평안에 이르게 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은 스스로 정한 주일성수의 엄격한 개인 규칙을 따르도록 다짐해야 한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제정한 주일성수의 규칙 중 어떤 것을 어겼을 때에는 정직한 자기 반성을 통해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파악하고 회복의 은혜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주일성수뿐만 아니라 삶의 전 방면에 하나님을 향한 자신이 경건에 결함이 있는지를 직시하는 기회로 회개하고 다시 분발하는 기회로 삼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신자들의 영적 변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 신자들이 현실적으로 주일이 주는 영적인 풍성함을 예배를 통해 충분히 누리게 될 때 주일에 세속적인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분주해질 가능성이 적어진다. 주일성수에 관해 논의 하면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바로 주일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에 모인 성도들이 진정한 부흥을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분명 영적인 어둠이 깊이 드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신자의 거룩한 삶을 위한 성령의 각성케 하는 역사를 과소평가하지 말자. 신자들이 은혜로 말미암는 영적 각성을 경험 할 때, 온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구는 탁월하게 증가하고, 주일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주일성수는 신자의 경건한 삶의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안이다. 거룩한 주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부흥이 없이는 거룩하게 지켜질 수 었다. 주일에 부어주실 영적인 은혜와 신령한 복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주일성수 의무를 예배의 참석으로 때우게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 대신 설교자의 재능을 의지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국 교회의 참된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교인들을 깊이 있는 성경공부와 신학 교육으로써 확고한 교리적 지식과 기독교 사상을 갖게 해야 하며, 이러한 체계적 지식과 사상의 틀 안에서 주일의 장엄한 의미를 인식하게, 그날에 영혼의 유익을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도록 예배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 주일이 참으로 ‘주님의 날’이 되도록 .....
김남준 목사님의 ‘주일성수’ 요약 글입니다! 샬롬!